<!-BY_DAUM->
행복의 씨앗 심기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다. 아마도 불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허나, 행복과 불행한 생활을 둘로 갈라놓는 중심축은 자신의 마음이란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행복의 주머니를 찰 수도 있고 불행의 주머니를 찰 수도 있는 데 말이다. 꼭 같은 상황인 데도 어떤 이는 ‘나는 행복해’하는가 하면, ‘나는 불행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한 마디로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같은 직장에서도 신나게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입에 풀칠하기 위해 마지못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 자체가 바뀌면 생활 자체가 변하고 삶의 질이 한 단계 더 올라감은 당연한 이치다. 우리 마음속에 행복의 씨앗을 심으면 행복이 싹트고 불행의 씨앗을 심으면 불행이 싹트게 마련이다. 어떤 씨앗을 마음밭에 심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것이라면 무리일까.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나는 행복해’를 마음속으로 외친다. 오랫동안 계속하다 보니, 이제 습관처럼 굳어졌다. 잠자리에서 영원히 잠들지 않고 다시 눈을 떴다는 데 우선 감사한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어, 팔다리를 휘두르고 목을 돌리며 발 부딪치기를 하면서 팔십 년 가까이 이렇듯 움직이게 버티어준 몸 각 부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저 태양은 나를 위해 저렇듯 우람하게 솟아올랐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러면 행복 충전이 돼 모든 일이 감사로 다가온다. 행복감이 전신을 휘감아 버린다. 매일처럼, ‘행복해’를 외치는 이는 행복 생활이 미소를 짓는 반면, ‘불행해’를 외치는 사람은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불행 생활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게 마련인 것이다.
마음속에 행복의 씨앗을 심으면, 엔도르핀 (Endorphin)이 자연적으로 솟구치게 마련이라는 게 의학계의 일반적인 논리다. 엔도르핀은 뇌에서 분비되는 통증억제 물질로, 진통효과가 탁월해서 기분을 좋게 함은 물론이려니와 통증도 크게 완화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마음에 따라 좌우되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마음이 정하는 방향대로 춤추며 이동하는 게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몸뚱이라 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하다.
나는 자신을 관장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 어떻게, 마음속에 매일 행복의 씨앗을 담아낼 것이며 엔도르핀을 발산시켜 즐거운 인생, 신바람 세상의 노년을 장식할 수 있을까를 나름대로 생각하며 시간을 쫓아내고 있다.
행복의 씨앗을 담아내기 위한 도구를 나는 몇 가지 갖고 있다. 무엇보다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찾아온 상황에 만족하는 자족하는 마음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 현실에 만족하면서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다. 특히 나이 들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은 노욕이라고 해서 금물로 돼 있다. 욕심을 털어내지 않고는 만족이 있을 수 없으며 그럴 경우, 모든 것이 불만 덩어리로 바뀌고 만다. 현실에 만족하고 그 자족을 넘어 위를 향해 매진하자는 것이 나의 신조라면 신조다. 그럴 때 우리의 몸은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돼 있다. 긍정적인 사고는 우리 몸의 윤활유를 쳐주는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부정적인 사고는 모든 일을 뒤틀리고 꼬이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게 마련이다. 변함없이 밀려오는 날마다, 나는 감사함과 고마운 마음, 긍정적인 생각으로 채우기 위해 힘을 모아가고 있다. 그러면, 자연 엔도르핀은 부속품처럼 뒤따라오지 않겠는가.
엔도르핀을 생산해내는 나의 도구로 먼저, 땐스스포츠를 들 수 있다. 이는 내가 직장을 퇴직하고 프리랜서로 방송일을 할 때부터 시작을 했으니, 이십 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어온 것이다. 방송 후의 한가했던 시간이 너무 아까운 나머지 시간 활용을 위해 시작한 것이 이 운동인 데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으니 여간 고맙고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건강이 허락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그렇다. 무릎이 견디어줘야 가능하고 허리가 허락해줘야 만이 가능한 운동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제는 취미 생활을 넘어 나에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이용되고 있다고나 할까. 이 나이까지 뛰게 허락한 몸에게 무한 감사와 함께 찬사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다음, 엔도르핀을 안겨주는 마약은 하모니카다. 이는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불기 시작했으니 족히 육십 년은 넘은 것 같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사사받은 일도 없다. 그냥 독학으로 배웠다고나 할까. 무턱대고 불고 불다보니 이젠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하모니카에 입만 갖다 대면 노래가 되어 나온다. 이것이 노하우란 것일까. 나는 지금도 악보를 제대로 볼 줄 모른다. 그러니 자연 악보를 보고는 하모니카 연주(?)가 되어 나올 리 만무하다. 노래부터 익힌 다음, 하모니카를 불어보는 것이 순서처럼 돼있다. 마음이 답답하고 착잡할 때 하모니카를 벗하게 되지만, 소화가 잘 되지 않을 때도 하모니카를 불면 소화도 잘돼 얹혔던 체증까지 내려가는 기분이다. 사실 하모니카를 불 때도 노래를 부를 때 이상으로 배의 움직임이 반복되게 마련이다. 하모니카를 잡으면 모든 잡념이 사라져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도취된다. 기분이 만점이고 날아갈 듯 엔도르핀이 발산한다.
또 하나가 있다. 바로 피아노다. 피아노 역시 내가 자신에게 도취한 나만의 연주(?)랄까. 하모니카와 비슷하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게 아니고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눌러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 음에 맞게 노래가 되어 나온다. 나 만에 독특한 독주회라고나 할까. 귀의 감각으로 음 높낮음을 측정해 건반과 함께 논다. 이 역시 신바람이 나고 즐겁다. 자연 엔도르핀이 솟구치고 행복의 씨앗이 마음속 깊이 싸여간다. 한마디로, 나만의 서툰 피아노 연주지만, 나에겐 둘도 없는 친구며 동반자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편, 결혼주례와 노인대학 강의도 엔도르핀을 더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10년 동안 삼백여 쌍에 달하는 젊은이들에게 주례를 맡아 줬다. 이 주례 역시 나에겐 엔도르핀을 마음속 깊이 심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례단에 오르지만, 축하내빈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들로부터 전해 듣는 찬사는 가끔은 꺼져가는 엔도르핀에 불을 집혀주기에 충분하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오늘 주례선생님처럼 내용 좋고 목소리 끝내주는 주례사는 처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내 기분은 비상하게 마련이고 더욱 보람을 느낀다. 그래서 결혼주례는 나에게 마약처럼 다가서는 엔도르핀을 선사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 하나를 든다면, 노인대학 강의다. 육 년여 전부터 시작한 이 강의도 나에게는 활력소와 함께 엔도르핀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평생을 마이크와 함께 한 인생. 지금까지 마이크를 멀리하지 않고 많은 노인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전할 때 쏟아지는 뜨거운 박수갈채, 아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짜릿한 쾌감을 알 리 없으리라.
행복은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이 이 행복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기만 하면 행복은 손쉽게 잡혀준다. 거절하는 법이 없다. 그런데 불행을 자초하는 사람들은 행복에 가까이 다가서기를 망설이고 있다. 마음문을 활짝 열고 가까이 가기만 하면 행복은 언제나 웰컴으로 다가서게 마련이다. 용기를 잃지 않고 행복의 씨앗을 마음속에 심기 위해 우리 모두 마음문을 활짝 열어젖혔으면 하는 마음이다. 마음속에 행복의 씨앗을 싹틔워서 엔도르핀을 가슴 가득히 안아 보자. 특히, 행복의 씨앗을 마음속에 담는 일이야말로 우리 노년들에겐 건강의 길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기에, 주저함 없이 용기 있게 다가서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