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집들이

그레이스파파 2006. 7. 20. 16:55
                                


                                                  집들이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학시절 친밀히 지내던 친구 몇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려하니, 와서 정담을 나누며 뜻있는 시간을 갖자는 내용의 전화였다. 작년에 좋은 몫의 땅을 사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올 가을 아담한 2층집을 새로 마련했는데, 이를 구실로 “집들이”를 한다는 것이다.

퍽 반가운 전화였기에, 그 날 하루는 학창시절을 회고하며 20대 초반 대학 생활로 되돌아간 착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마음에 설레기까지 했다.

전화로만 서로 소식을 전하다가 몇 달 만에 만난다는 기대 속에 약속한 주말 오후가 꽤나 기다려지기도 했다.

만나면 누가 더 흰머리가 많아졌느니, 누가 더 주름살이 많다느니 하는 얘기들로 인사가 시작되는 것이 예삿일처럼 돼 버린 지도 몇 년째 되는 것을 보면, 멈출 줄 모르고 정직하게 내 닿는 세월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서로가 형님이라고 우겨대던 학창시절의 기발한 생각과 발랄한 모습들을 오랜 세월은 이처럼 바꾸어 놓은 것이다.

나는 토요일 오전 일과를 마치고 말끔히 이발까지 했다. 그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최근 주택가로 인기가 있는 강남(江南)으로 차를 몰았다. 과거 많은 추억들이 소록소록 되살아나,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다.

정치가가 되겠다고 항상 정치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학교 내의 모의국회가 열릴 때면 의장까지 맡아 당당히 잘도 해내던 “민”이란 친구는 그의 뜻대로 초지일관하더니 지금은 2개 군의 군민(郡民)들을 대표하는 선량이 되었고, 인정 많기로 유명했던 “환성”이란 친구는 의사가 돼서 돈이 없어 치료 못해 죽어 가는 아까운 생명들을 구해 내겠다고 전과(轉科)까지 해 의예과로 옮기더니 기어이 의사가 돼 호젓한 고향으로 낙향해서 병원을 차렸으며, 깐깐한 성격에 굽힐 줄 모르던 대쪽같은 성경의 “성구”란 친구는 대학 졸업 후에도 몇 년 동안 산사(山寺)를 찾아 고시합격에 인생을 걸더니만 드디어 고시를 관철해서 판사로 있더니 얼마 전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개업을 했다. 변호사 개업 때 축하 화분을 전해 주고 만난 후, 오늘에야 그 친구가 “집들이”를 한다고 초대를 한 것이다.

달리는 차 속에서 이 친구, 저 친구의 학창시절을 나름대로 회상해 보면서 새로 아담하게 지었다는 집의 모양을 그려봤다. 어떤 모양의 집이며, 향방은 남(南)일까 동(東)일까? 그 친구의 성격으로 봐서 꽤나 빈틈없는 집 단장을 했을 것을 머릿속에 그리다보니 차는 벌써 은행을 돌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내리고 보니 상상한대로 확 트인 정원에 아담하게 자리한 새집이 눈에 들어 왔다.

일찍 온 친구들의 차가 여기저기 골목길 옆에 세워진 것을 보나, 간간이 들려오는 호탕하고도 밝은 웃음소리로 미루어 보아 집들이를 하는 친구 집이 확연했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내 마음까지 새로워진 느낌이었다. 새로이 들여다 놓은 가구 일체며 모든 소품들이 제자리에 잘도 조화를 이뤄, 거실은 거실대로 서재는 서재대로 잘도 어울렸다. 이곳저곳 벽 마다엔 역대 대가(大家)들의 글씨도 걸려 있고 거실에 펼쳐진 근세 대가의 8폭 짜리 동양화 병풍은 유난히 돋보였다. 그리고 서실 한 모퉁이엔 아름다운 자태를 한 미녀 상(美女 像)이 약간은 수줍은 듯 영원히 변함이 없을 미소를 지으며 반가이 나를 맞아 주는 듯 했다. 대리석으로 조각된 미녀의 나신, 그 나신은 분명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포용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 변호사, 집 짓느라 수고 많았겠네 만, 언제 이렇듯 값지고 귀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나?”라는 내 물음에 친구의 대답이 걸작이면서도 한편 수긍이 갔다. “내가 뭘 소장했다고까지 할 수야 있나? 내가 작품들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 작품들이 나를 따라 스스로 온 거지.”라며 껄껄 웃는 그의 얼굴에선 동심으로 돌아간 듯 티 없이 밝은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성구”란 이 친구는 학창시절부터 그림에 대해 남달리 조예와 관심이 있었던 터라, 나도 이 친구 권유에 못 이겨 전시장을 자주 찾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책과 씨름하다 골치가 아플 때면 학교 근처 야산을 올라 스케치를 하던 추억도 떠올랐다.

딱딱한 법률공부에 무한한 미(美)의 세계를 추구해 가는 그림공부를 곁들여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경직해지기 쉬운 법학도에겐 안성맞춤의 취미생활이라고 당시 나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다섯의 동창들이 둘러앉아 담소하며 술잔이 오가다 보니 모두의 얼굴이 홍

당무처럼 변해 있었고 흥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 집들이는 이렇듯 오고 가는 술잔 속엔 깊은 옛 정이 소복소복 담겨져 흘러넘치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 다 묻어 버린 채 옛 친구들이 서로를 깊이 보며 마음을 주고받은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몸들은 60을 바라보지만, 마음만은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 자정이 넘도록 마시고 담소하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다음 날 초대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어제 놓고 간 그 선물, 정말 고마웠다는 것이다. 집들이를 한다기에 나는 무엇을 갖고 갈까 이것저것 생각하다, 나도 아끼는 동양화 한 폭을 표구해서 가져갔다가 말없이 슬쩍

놓고 온 것이다. 그랬더니 그 그림이 자신에게 그렇게도 마음에 들 수가 없어 서재에 걸어 놓고 책을 볼 때마다 늘 나의 고마운 마음을 함께 읽겠노라 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나니,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게 되면 스스로 좋은 작품들이 찾아 온다”는 “성구”란 친구의 어제 말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 한국 대표 수필선집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