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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을 당기는 마음

그레이스파파 2006. 7. 20. 17:02

                                 

                

                                   활을 당기는 마음


요즘 각 직장마다 각종 동우회가 많다. 등산, 서예, 바둑, 테니스, 달리기,  꽃꽂이 등등-. 각자의 취미 따라 종류도 각양각색이며 그 수도 부쩍 늘어났다. 어떻게 보면 우리네 삶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어 윤기가 도는 단면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우리 직장에는 새로이 궁도회(弓道會)가 만들어졌다. 어떻게 보면 수염을 길게 기른 촌로(村老)들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 활이기도 하다.

어딘가 고리타분한 느낌이 드는 취미생활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고풍(古風)의 오묘함과 용감무쌍한 기풍이 궁도 속에 무리 없이 조화돼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십 여명의 동호인끼리 일과 후 자리를 같이해서 자신의 삶을 화살과 더불어 겨냥해 보는 것이 요즘의 내 생활에선 더 없는 즐거움이 돼 버렸다.

취미생활로 활을 당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옛날의 전쟁장면을 자꾸만 연상하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육중한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활을 쏘아 이 조국을 지켜온 장면들이 떠오른다.

당시의 활은 호국정신의 구심점이었을 것이고 또한 무과급제의 첫째 조건이었음은 두 말할 것도 없었으리라. 그런 활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취미생활의 하나로 어엿이 탈바꿈을 한 것이다. 옛날엔 당당한 무사(武士)가 아니면 감히 쏘아 볼 수 없었던 주무기였던 활이 현대에 이르러선 누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로 탈바꿈 돼 버린 것이다.

현대인들은 불만투성이의 환경 속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생활해 가고 있다. 미련히도 자기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서-.

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인생의 시한(時限)점을 향해서 쉼 없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안고 있는 무력함이요, 숙명인 것이다. 쌓여져 풀길 없는 마음의 갈등을, 그리고 이미 태어나자마자 조물주로부터 종착역에 다다를 시간이 결정지어진 한정된 인생을 나름대로의 인생관에 접목시켜 나아가려는 생각들은 누구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의 취미생활도, 직장에서의 동우회모임도 이를 보다 조화롭게 승화시켜 나아가려는 노력의 단면이 아닌가 한다.

아무튼 활을 당기는 멋이란, 당겨 본 사람만이 아는 오묘함이 있다. 145미터 거리에 세워져 있는 과녁이 내 인생의 종착역이라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화살에 실어 날려 보내는 궁도야말로 찌든 사회 환경 속에서 둔탁해지기 쉬운 자신의 양심을 바로 잡아주는 반려자가 아닐 수 없다.

무지개처럼 곱지는 않다 하더라도, 멋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나 같은 햇병아리 초년병들에게도 명중이라는 행운을 안겨다 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하찮은 내 인생 설계도 결코 몽상으로만 끝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갖게 된다.

누구나 인생을 양심 바르고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려는 마음엔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인간은 요사스럽고 간사한 존재여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무력해지게 마련이다. 그 누구도 양심이란 없을 수 없지만, 양심은 때에 따라 먹구름 속에 가려지기도 하고 사정없이 내동댕이 처지기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말하고 있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된 것이고 언젠간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죄는 미워해도 인간 자체는 미워해서 안 된다”는 말도 있듯이, 현실 사회를 미끼로 해서 자신의 양심을 묻어둔 채 인생관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양심을 기만한 이중적인 삶이 결코 그 누구에게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동호인끼리 어울려 활을 잡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순간적일 수밖에 없는 인생을 보다 올곧게 살아가려는 한 가닥 양심에 이끌려 뒤늦게나마 용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악조건에서도 굽힘없이 곧게 내닿는 화살의 정직함에서 교훈을 찾으려는 조심스런 마음으로 말이다.

화살이 곧게 나아가지 않을 수도 없지만, 만일 화살이 우리 인생처럼 갈팡질팡 좌우로 흔들리며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면 내 일생동안 영영 활을 잡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정성을 다해 당기면 당길수록 과녁에 가까이 날아가 꽂히는 화살, 이 얼마나 속일 줄 모르는 정직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오늘도 비뚤게 갈 줄 모르는 이 화살에 하찮은 내 인생을 실어 정성껏 활을 당길 생각이다.                      ( 한국 수필 1980. 가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