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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판 웃음 꽃

그레이스파파 2006. 7. 20. 17:05

 



                                            한판 웃음 꽃


나름대로 젊음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는 KBS란 거대 조직은, 어느 직장보다도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톡톡히 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화가 많이 걸려오기도 하지만, 연사섭외로부터 프로그램이 완성되기까지 전화라는 숨은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어(魚)씨 성을 가진 종친들은 누구나 뼈저린 경험을 지니고 있을 터이지만, 나도 초면부지의 사람과 통화라도 할라치면 십중팔구가 성을 바꾸어 부르는 게 보통이다. “아니, 오(吳)가 아니라 고기 어(魚)라구요.” 목이 아플 정도로 몇 번을 강조한 뒤에야 “아! 그러세요, 오씨가 아니라 어씨라구요” 이렇듯 가벼운 송수화기를 통한 “한판 웃음 꽃”이 펼쳐진 후에야 나의 본 성을 되찾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전화를 통해 상대방과 통성명을 하자면, 으레 뒤따르는 한 예를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얘기지만, 군에 입대해서도 성에 대한 일화는 예외가 아니었다. 중대장이 명찰을 보고 “이호선”하고 큰소리로 호명을 했다. 나를 부르는 게 분명한 것을 알고 있지만,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눈을 부라리며 다시 불렀지만, 묵묵부답인 나에게 매라도 칠 기세였다. “어”자를 “이”자의 흐린 글씨로 착각하고 오인해 부른 것이 틀림없었지만, 내 자존심이 용납지 않으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KBS란 직장에 입사할 때도 성으로 인한 일화는 뒤따랐다. 잠시이긴 했지만, 성으로 인해 나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든 적이 있다. 아나운서 시험을 봤을 때의 일이다. 1차와 2차 음성테스트를 거쳐 필기시험을 치르고 발표일 만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내 이름 석자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발표 당일 정오 뉴스 시간을 통해, 현재 미국에 이민 가 살고 있는 이광재 아나운서가 “이호선”은 분명 합격자로 발표를 했으나 “막상 ”어호선“이란 이름은 빠져 들을 수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성씨로 인한 숱한 애환을 갖고 있는 터라 “어”자를 “이”자로 잘못 쓸 수도 있고 또 설령 옳게 썼다고 해도 잘못 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서울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내 추측이 다행히 맞아 떨어 진 것이다. 분명 수험번호가 같은 “어호선”이란 이름 석자가 합격자 명단에 있음을 확인한 그 순간의 감격은 오랜 세월의 뒤안길에 묻혀 버렸지만, 지금도 뇌리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모 지방 방송국에 발령을 받아 햇병아리 아나운서로 근무를 할 때의 일도 기억에 새롭다. 예나 지금이나 뉴스를 끝낸 다음엔 네임 사인을 넣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는데, 이름을 밝힐 때마다 “어”자인 성에 악센트를 강하게 부치는 것은 습관처럼 돼 있었다.

말로 하면 “어”자를 “오”자로 오인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되었을까? 웬 여인 한사람이 방송국으로 찾아왔다. “오”아나운서가 틀림없겠지만, “어”아나운서로 들리기 때문에 혹시 해서 찾아왔다며 게면 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객지에서 어찌나 기뻤던지, 조카뻘 되는 부인의 손을 듬뿍 잡고 서로 놓지를 못한 기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로도 방송을 통해 많은 일가(一家)들을 만나 가깝게 지냈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눈물까지 흘리며 섭섭해 했던 일은 희소가치의 성을 가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겹고 흐뭇함이리라.

몇 년 전엔 건강이 좋질 않아 병원 신세를 진일이 있었다. 병상 카드에 성이 “어”자가 아닌 “이”자로 잘 못 적혀있음을 보고도 태연자약했다. 성을 제대로 불러주고 써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만성이 된 탓이리라. 하지만 간호사가 바뀔 때마다 성을 바꾸어 부르는 데는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한자(漢子)를 쓰는 경우에도 애환은 뒤따랐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엔 성이 어(魚)자가 아닌 노(盧)자로 바뀌어져 있었으니, 한자로 써도 성은 수난을 당하곤 했다..

직장을 마친 후, 후배들이 배려해 준 자리도 방송을 하는 곳이기에 성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또 마련된 셈이었다. 바로 증권거래소에 마련된 “KBS 스튜디오”란 자그만 공간에서 마이크란 괴물(?)을 통해 “어”자란 낱말에 각별히 악센트를 부여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 만무했다.

어씨 성을 가진 사람치고는, 어릴 때부터 “어씨 성도 다 있나“하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어 온 것은 아마 나 혼자만의 애환만은 아니었을 성싶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아오는 동안 성(姓)으로 인한 불만이나 불평을 해 본 적은 없다.

고등학교 시절, 경기도 용인이 고향인 한 친구의 집을 찾은 일이 있었다. 집칸을 보나 뭐로 봐도, 당시 농촌에서 이렇다 할 가문임에 틀림없었다. 수염을 위엄 있게 기른 할아버님 앞에 넓죽이 절을 하고 나니, 대뜸 성씨가 뭐냐고 물으신다. 조금은 위축된 마음으로 “함종 어(魚)가 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외로 칭찬이 이만 저만이 아니셨다. 뼈대 있는 가문의 자손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으시며 극찬했던 일은, 먼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뇌리에 각인돼 있을 정도로 새록새록 하기만 하다. 당시 홍안의 내 얼굴이 더욱 빨개진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거니와 그 때처럼 내 성에 대해 뿌듯하고 으쓱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랫동안 기억해 주고 있는 것은 이름 두자 때문이기보다는 성 한자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알고 난 후엔, 성에 대한 매료함까지 느끼게 된 것이 사실이다. 이는, 많은 종친들이 사회 각계에서 두각을 보이며 활약하고 있는 결과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즘 들어 초면부지의 전화통화에서도 성을 바꾸어 부르는 경우가 없는 것을 보면, 쓸모 퇴직이후의 나이를 탓하지 않고 방송이란 매체를 통해 어씨 성을 올바르게 알리는데 나도 일조를 한 것 같아 자조의 미소를 짓곤 한다.

사실상 “어”라는 글자는 “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찍거나 “오”라는 글자를 90도로 바꾸어 놓으면 되는 아주 기억하기 쉽고 쓰기 또한, 좋은 글자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처럼 쓰기도 읽기도 쉬울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선조 들이 큰 획을 그었던 업적을 이해하고 어(魚)씨란 성을 많은 사람들이 똑똑히 기억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서 초면부지의 사람과 통성명을 할지라도, 목청껏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성을 착오해서 부르는 상대방의 무안함도 덜어줬으면 한다.

그러나 통성명을 할 때마다, 얹혔던 체증을 소화해 낼 정도의 특이 요법(?)인 송수화기의 “한판 웃음 꽃”이 자취를 감추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 한국 수필 1980. 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