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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이란 보약

그레이스파파 2006. 7. 20. 17:13
 

                  칭찬이란 보약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칭찬엔 인색한 것이 보통사람들의 자화상인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나이든 우리세대와는 달리 남녀간에 사랑 표현은 잘하는 편인데, 칭찬엔 어색하고 서툰 모습이 역역하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자 없는 것처럼,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해 주는 사람에게 어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있으랴.

칭찬은 미소를 담아내는 샘물이요, 활력을 불어넣는 영양제요, 상대방에게 먹일 수 있는 최고의 보약이며 밑천 한 푼 들이지 않고 지을 수 있는 명약중의 명약이다. 더욱이 부부간의 칭찬은 그 효과를 배가시켜, 인삼 녹용 산삼이 들어간 어떤 보약보다도 효과 빠른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존심이란 덫의 올가미를 헤어나지 못해 무진장으로 축적돼 있는 이 명약을 사장시키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칭찬은 시들어가는 사랑을 일으켜 세우는 “사랑의 촉매제”인 동시에 “사랑의 묘약”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 핀잔을 일삼는다면 사랑은 사막처럼 메말라 버릴 것이다. 부부 서로가 하루에 한 번씩 칭찬을 주고받는 습관을 생활화하도록 해서 건강하고 밝은 가정을 이룩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래서 혼탁해져가는 이 사회가 해맑은 아침햇살처럼 영롱히 빛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구절은 내가 결혼 주례를 집례 할 때, 신랑 신부에게 당부하는 말 가운데 첫 번째로 강조하는 대목이다. 말하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해온 나에겐 젊은이들에게 삶의 지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는 결혼 주례가 내 특기(?)를 살리면서 마지막 사회봉사의 길이라고 여겨져 청탁을 해오면 사양치 않고 수락하는 편이다. 예부터 결혼 주례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 난 고매한 인격을 갖춘 인사들만이 할 수 있는 전유물처럼 돼 있었다. 요즘은 보편화된 편이긴 하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차례가 닿을 때마다, 분에 넘치지 않나 싶어 때론 망설여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 동료와 선후배 자녀들의 주례 부탁을 받다보니, 어느덧 130여건이 넘는 주례를 하기에 이르렀고 또 앞으로 얼마나 주례를 집례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혼율이 점차 높아져가고 있는 요즘, 내가 주례를 선 부부만이라도 자존심을 묻어두고 칭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칭찬문화”를 만들어갔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매일 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이에, 사실상 자존심이란 허울은 훌훌 벗어던져야 한다. 필요 없는 자존심을 지키려다 보니, 겉잡을 수 없는 가정문제로 비화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남편은 양보하는 도량을 보여야하고 아내는 한 발짝 물러설 줄 아는 아량을 발휘할 때, 가정이 화목하고 화평해 진다는 점도 잊지 않는다. 밥만 배불리 먹고 살 수 없는 현대인들은 꿈과 사랑을 더불어 먹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돼버렸기에, 그 꿈과 사랑을 서로가 심어주기에 익숙한 부부가 돼달라고 당부한다. 사람이란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겸비했다하더라도 한두 가지 단점은 숨어있게 마련이다. 1년 2년 세월이 흐르다보면, 상대방의 단점이란 옥에 티가 하나 둘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럴 때 단점은 보듬어 감싸주고 장점은 부각시켜 칭찬을 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묘약”임을 일러줄 땐, 마음속 깊이 공감하는 눈치가 여실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먼저 실천할 덕목으로는, 부부 서로가 칭찬할 것을 특별히 힘주어 강조한다.

주례사는 인생을 먼저 살아오고 경험한 인생선배의 입장에서 당부하는 말이긴 하다. 한 가정을 이루어 새 출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생에 최고의 축제행사를 주관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 보아 넘길 일만은 아님에 틀림이 없다. 일반적으로 짧으면 짧을수록 주례사는 좋다고들 한다. 사실상 짧은 주례사를 하기가 더 어렵고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 언급하고 강조해야 할 내용을 빠짐없이 담아서 축하객들에게까지 공감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례사 내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목소리나 억양, 정확한 발음과 고저장단, 설득력 등이 하모니를 이루어 전달이 돼야함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은 일이다.

나의 경우는 모두 다섯 가지 덕목을 당부하게 된다. 둘째와 셋째 그리고 네 번째 당부는 건너뛰기로 하고, 마지막은 양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결혼 후에도 형제자매 집안 간,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부모님은 무한정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유가 생긴 후에 효도를 하겠다는 사람은, 생전에 효도 한번 해보지 못하고 평생을 후회하게 되어 있다. 물질적인 효도보다 정신적인 효도가 앞서야하고, 부모님께 으뜸가는 효도는 뭐니 뭐니 해도 둘이서 알콩달콩 새록새록 아주 재미있게 잘 살아주는 것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신랑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는 것처럼, 장인 장모님께 효도를 다해야 함도 빼놓지 않는다. 그래야만 자연히 신부도 시부모님께 극진한 효도를 다할 것임을 신랑에게 넌지시 일러준다.

“인생은 생방송”이란 노래도 있는 것처럼, 두 번 다시 살 수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요, 인생이다. 지금 결혼하는 젊은이들처럼 활력이 넘치는 인생으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참으로 멋진 인생그림을 그리며 살고픈 데--.

이는 누구나의 희망이고 바람일 뿐 이미 떠나버린 버스나 다름이 없다. 후회는 언제나 인생이란 뒤안길에서 서성이며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인가 보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일들이 마냥 후회스럽기만 하니 말이다. 그래서 그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후회를 낳는 산물이라고--. 지나간 날에 집착하기보다는, 닥아 올 내일에 희망을 걸며 사는 삶이 현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뜻대로 그려갈 수없는 것이 인생이요, 결국 후회 속에 살다가 구름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존재가 인생 그 자체인가보다.

오늘에 충실하자. 그리고 성실하게 살자.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최후의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인생 마지막자락에 서있는 나의 바람이자 목표라면 너무나 군자 같은 말일까. 그래야만 스쳐온 과거도 아름답고 닥아 오는 미래도 나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달려오지 않겠는가. 여기에 행운의 여신마저 미소를 지어준다면 금상첨화이고.

끝으로, 나는 한 송이 꽃봉오리처럼 활짝 피어난 신혼부부들의 멋들어진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례사를 마무리한다. 오늘 결혼한 신랑 xxx군과 xxx양 부부는 자신들의 행복뿐만 아니라, 불우한 이웃들과 이 사회와 국가 민족을 위해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랑으로 넘쳐나는 가정을 이룩해 주기를 바란다고. 아울러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이룩하기 위해 서로가 아낌없이 사랑하고 칭찬하며 양보하고 이해해서 사랑의 금자탑을 높이 쌓아올리는 금슬 좋은 사랑의 부부가 돼달라고 마지막으로 간곡히 당부하면서---.                             

            (경기 PEN문학 2005. 제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