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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땅

그레이스파파 2007. 2. 27. 11:17
 



                           천혜의 땅

                                                  

  참으로 눌러 살고 싶은 땅이다. 공기 좋고 물 맑아, 더욱 나를 유혹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마도 혈기가 왕성했던 젊은 시절 이곳을 찾았다면, 나는 분명 이민을 와 있었을 것만 같고 따라서 지금쯤은 이곳 사람이 돼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봄, 오랜만에 아내와 오붓이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에 나섰다. 이미 다녀 온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들어 온 터이지만, 그곳은 천혜의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적어 아직까지는 자연 환경이 청정해 사람 살기에 더없이 좋은 나라란 얘기를 듣고 가긴 했다.

  막상 찾고 보니, 들어 왔던 말들이 사실로 피부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코끝에 와 닿는 공기가 혼탁한 서울 공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수돗물도 꼭 온천수를 연상케 하리 만큼 매끄럽고 좋았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오염되지 않은 환경에 반했다고나 할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그 옛날 아련한 고향으로 나를 되돌려 놓았고, 파란 하늘을 등에 이고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노니는 양떼들의 모습은 천진난만했던 소년시절에 순수했던 동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어찌 그뿐이랴!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듯, 드넓고 깨끗한 호수들은 내 옹졸했던 마음까지를 포용하고 끌어안는 넉넉함을 간직해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것들이 한결같이 나를 오라 손짓하는 것처럼 유혹의 손길을 보내고 있었고, 나를 붙들어 매기에 손색이 없는 자연 환경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철없이 굴던 어린 시절을 연상해 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초 여름밤, 모기를 쫓기 위해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아버님 품에 안겨 팔베개하고 멍석에 누워 별을 헤던 아련한 추억들을 건져내기에 충분 하리 만큼, 멀리 달아나 버린 아득한 옛날로 나를 떠밀어내고 있었다. 이곳엔 지금도 밤만 되면 별들의 속삭임이 줄을 잇고, 여기저기 별들의 숨바꼭질 또한 여전했다. 60년 전 내가 살던 아름다운 고향의 밤하늘을 이곳 수만리 떨어진 타국 땅에 와서 다시 발견한 것이다.

  뉴질랜드에는 워낙 호수가 많긴 하지만, 내가 묶고 있던 호텔 앞에도 ‘테아나우’란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깊은 곳은 수심이 무려 400미터에 이를 정도로 깊고 넓은 호수였는데, 산책로를 따라 길게 드리워진 형형색색의 조명등이 어두운 밤 적막을 뚫고 호수에 비친 모습은 혼자 보기에 아까우리만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오랜 기간 직장생활을 하며 출퇴근을 한 관계로 그동안 해외여행은 안중에 둘 수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난들 유유자적하며 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 동안 마이크 앞에 묶여있는 바람에 해외 나들이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 오랫동안 감옥살이(?)했던 마음을 달랠 겸 용기를 내어 해외 나들이를 계획했던 것이다.

  먼 나라로부터 시작해 가까운 나라로 다녀오라는 선배들의 충고도 있고 해서, 당초는 남아메리카나 북 유럽 쪽으로 가볼까도 했었는데, 3월엔 오세아니아 쪽이 기후적으로 가장 좋다는 다수의 의견을 좇아 이곳을 여행지로 택한 것이다. 이곳에 도착해서 가이드가 하는 일성(一聲)인즉, 무엇보다 나무와 동물사랑이 각별한 나라라고 귀띔을 해 줬다. 그리고 보니 넓은 시드니 시내에 아파트라곤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주택 곳곳엔 나무들이 무성해 주택가인지 공원지구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내 곳곳엔 숲을 연상하리만큼 나무들로 꽉 차있었다. 나무 사랑이 얼마나 각별한 국민들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또 개를 비롯한 동물 사랑이 어찌나 극진한지, 여자들의 경우는, 남자들보다 개를 더 우선 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자가 가장 으뜸이며 다음이 개이고 그 다음이 남자의 순으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이 크게 위안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뉴질랜드에 당도해 보니 그 말이 피부에 닿음을 감지하게 됐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이상한 장치가 벽면에 설치돼 있었다. 알고 보니 어린아이 기저귀를 갈아주기 위한 곳이란다. 여자 화장실이 아닌 남자 화장실에만 유독 설치돼 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남자들이 아이들을 안고, 업고 다니다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기 때문에 남자 화장실에만 유독 기저귀대가 설치돼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는, 요즘 우리 한국도 남녀평등 시대를 맞아 여권신장이 크게 향상됐을 뿐 아니라, 여성 호주제까지 통과를 앞두고 있긴 하지만, 이곳에선 벌써부터 여권 신장이 최대한 이루어진 나라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아이들을 4명만 낳아 기르면, 한달에 4천 5백 달라가 지원된다고 한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4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어려워 남자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또 8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는 가정엔 직장을 갖지 않고서도 벤츠 승용차를 굴릴 정도로 정부로부터의 막대한 지원이 뒤따른다고 한다. 복지국가답게 학생들에rps 장학 수당이 뒤따르고 정부에선 심지어 과부 수당까지 준다고 하는데, 기이한 것은 홀아비 수당만은 없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남녀평등의 도를 넘어 여성 우대에 남녀불평등 사회로 내닿는 나라인 것만 같아 다소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호주나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동물은 무엇보다 양이 아닌가 한다. 또 양하면, 무엇보다 먼저 보드라운 양털을 연상하게 된다. 특히 양털 이불은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해서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사시사철 덮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양모의 특성상, 겨울엔 털들이 붙어 있어 따뜻하고 반대로 여름엔 털들이 떨어져 있어 시원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양은 보통 7년까지 산다고 한다. 하지만,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생후 5년이 지나면 대부분 처분해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수놈 1마리에 암놈 20마리 정도를 넣어 기르는 것이 보통인데, 암놈이 교배를 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아보는 방법도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교배 시기가 다가오면 수놈 앞가슴에 파란 페인트칠을 해 놓는다고 한다. 교배를 한 암컷은 파란 페인트칠이 분명히 등에 묻어 있는 놈이란다. 새끼 양 한 마리는 우리나라 돈으로 2-3만원 정도 값이 나가고 1년에 털은 두 번 깎아준다고 한다. 강원도 평창에서도 기르고 있다고 하는데, 여건이 허락된다면 나도 한 마리쯤 길러봤으면 하는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안타까운 것은 근래 들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양치는 목축업은 사양산업이 되어가고 있고 대신 사슴농장으로 대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씨가 착한 사람보고 양처럼 착하고 순하다고 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인 것만 같다. 수백, 수천 마리의 양들은 어느 놈 예외 없이 어린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만 보인다. 무아지경에 빠진 스님을 꼭 빼어 닮았다고나 할까? 우리 인간들의 세계는 간혹 악한들이 끼어 있게 마련이어서 이들을 제재하기 위한 법도 필요하고 교도소도 있어야 하지만, 이 세상도 양들처럼 청순한 사람끼리만 살아간다면 그 무슨 법이 필요하며 경찰과 법관이 왜 있어야하고 교도소가 서있을 리 만무할 것이다. 때늦으나마 나도 쓸데없는 욕심을 훌훌 벗어던지고 양들을 닮기 위해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쉽사리 동화가 될지는 의문이다.

  이번 오세아니아 주 여행에선, 만년 동안이나 쌓인 눈이 녹아내린다는 일명 “마운틴 쿡”도 장관이었고 명경지수처럼 맑은 일명 “거울 호수”에 비친 산도 별천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멋진 정경이었다. 또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도 명물 중에 하나였지만, 오클랜드 와이토모 동굴의 ‘반디 벌레’는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명장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번 호주와 뉴질랜드 여행에서 나에게 더 깊은 감명을 안겨 준 것은,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의 다정한 속삭임과 양들의 착하디착한 순수한 모습들이 아니었는가 한다.             (월간문학 200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