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먹고 사는 사람들
사람은 누구나 꿈을 먹고, 희망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오늘의 생활이 어제보다 나을 것이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꿈과 희망과 기대치에 비해 나타난 현실이, 너무 거리가 있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꿈과 희망이 기대이상으로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른 좌절감도 비례한다고나 할까? 여하간, 인간은 미지수인 꿈을 캐고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영장의 동물이다.
나는 작년에, 고향의 죽마고우 한 사람을 잃었다. 그 친구는 평소 의리에 철저한 사람이요,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대쪽같은 사람이면서 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남을 헐뜯거나 비판하는 것보다는 칭찬만을 앞세우는 겸허한 마음까지 갖춘 친구였다. 그런데 어쩌다 뇌에 종양이 생겨 투병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아들 하나를 보기 위해 결국 7남매를 두게 된 가장(家長)인지라, 어떻게든 병을 고쳐 회생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오랜 병상생활에서도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하게 투병생활을 했기 때문에, 숨을 거둘 때까진 환하게 웃으며 별 고통 없이 한 세대를 살다간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나와 한 직장에 있는 젊은 친구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척추수술을 받았는데, 수술결과가 좋지 않아 영구히 불구의 한스런 몸이 되고 말았다. 휠체어에 실려 다녀야만 했을 뿐 아니라, 성(性)마저 불구가 되고만 것이다. 의사의 실수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의사는 고민 끝에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지금도 이 친구는 휠체어에 실려와 근무를 하고 있다.
사실 이 복잡한 현대생활에선 내일의 내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 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한 처지가 언제 나의 경우가 될 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교통사고로 불치의 몸이 될 수도 있고, 졸지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는 슬픔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세상을 뜬 친구를 생각하고, 휠체어 인생이 돼버린 젊은 친구를 볼 때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가를 피부로 확인하게 된다. 무엇보다 건강한 몸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나름대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란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여서, 하루에도 희비쌍곡선이 엇갈리게 마련이다. 공연한 불평과 분노가 찾아들어 평온한 마음에 풍파를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를 어떻게 승화시켜 꿈과 희망으로 바꾸어 가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실에만 지나치게 안주하게 되면 발전이 없게 마련이고, 반면에 현실불만이 정도 이상 커지면, 마음의 갈등을 초래해 결국 상처만 남게 마련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꿈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첫째 조건인 것 같다. 거기다 자신의 존재를 선(善)과 밀착시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더욱 금상첨화가 아닐까 한다. 사실 행복은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 행복을 어떻게 확인하느냐가 열쇠인 것이리라.
물질과 권좌를 꿈과 희망으로 설정한 사람은, 결국 모래위에 집을 설계한 것과 다름없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우리의 건설기술자들은 지금 해외에서 가족들과 헤어져 찌는 듯한 더위를 무릅쓰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꿈을 먹고,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행복의 제일 조건인 건강을 갖고 있고, 자신의 건강을 해외 건설현장에서 불태울 수 있다는 것은 우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일정기간이 지나면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해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이들은 누가 뭐라 해도, 보다 밝은 미래의 꿈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보다 찬란한 내일의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월간 밀물 1990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