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의 건강 보약
가을이다. 남성들의 계절이라는 가을이 오는 둥 마는 둥 싶더니, 어디론지 숨어 버리려 잔뜩 꽁무니를 빼는 모습이다. 요즘의 가을 모양새다.
붉게 물들어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던 단풍이 세월에 떠밀려 힘없이 낙하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요즘의 마음이 왠지 애처롭기만 하다. 낭만보다는 공연한 사념(思念)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꼭 나이 탓은 아니리라 자위를 해보지만, 뒤로 물러나 앉아있는 궁색한 처지와 아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상념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어 벌써부터 벼르던 터라, KBS사우회에서 등산 행사를 갖는다는 소식에 만사 접어두고 스케줄을 잡아놓았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을 앞둔 설레는 마음이라고나 할까. 모임을 통해 가까운 친구들과 가끔은 가는 등산이지만, 이번 등산은 꽤나 기다려진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보고 싶던 옛 식구들의 면면을 대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리라.
등산복 차림에 배낭까지 둘러메고 관악산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백여 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정담을 나누며 얘기의 꽃을 피우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함박웃음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산 입구부터 시끌벅적 노익장들의 수다가 대단하다.
도시락을 챙겨들고 끼리끼리 군락을 이뤄 산을 오르는 길목엔, 붉다 못해 빨갛게 익어버린 낙엽 한 잎이 살래살래 아양을 떨며 머리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내일의 나를 암시해주는 듯싶어 마음이 그다지 편치만은 않다. 등산로 옆으로 졸졸 흐르는 물가엔, 피라미 같은 물고기들도 유유히 노니는 모습이 눈에 띤다. 등산길에 한층 재미를 더해 준다. 올라갈수록 상큼한 가을 내음이 코끝을 간질거린다. 몸도 마음도 하나같이 두둥실, 콧노래가 절로 튀어나온다. 서울 근교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 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올라갈 때는 끼리끼리였지만, 모두가 목적지인 4야영장으로 자연스레 합류해 자리를 잡았다. 산에서 먹는 도시락 맛은 참으로 일품이다. 그 어떤 진수성찬이 이에 비길쏜가. 오가는 술잔마다 옛정이 소복소복 쌓여 넘친다. 몸은 따라주지 못할망정 마음은 4·50대 장년의 모습 그대로가 완연한 모습들이다. 산을 오른다는 자체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건강하다는 증거다. 갈 때 땡전 한 푼 지니고 가지 못하는 삶이라면, 건강보다 더 귀하고 값진 것이 어디 또 있으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내년을 기약하는 모두의 뒤안길엔 건강을 약속하는 잔잔한 기원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